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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200년 전 다산(茶山)에게 삶의 길을 다시 묻다

노상학

노상학 / 회사원(미술애호가)

독자투고(56) 

 

조선을 대표하는 경세가이며 사상가인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의 탄생 250주년 기념 특별전이 지난 6월 중순부터 8월 초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과 전남 강진군 다산 기념관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는 다산 관련으로는 역대 최고 규모로 친필 저술은 물론 시(詩), 문(文), 서(書), 화(畵) 등 각종 문예작품 및 가족, 제자관련 유물 등 총 150점이 소개 되었다. 지금까지 다산은 실학자, ‘목민심서’ 저자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좀 더 내밀히 들여다보면 백성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조선을 일깨우고자 한 개혁사상가이며 실용주의자라 할 수 있다. 특히 일상에서 가족 간 혹은 사제 간 주고받은 격의 없는 간찰과 여기(餘機)를 이용하여 무심히 붓을 놀린 서화는 그의 다정다감하고 자유분방한 또 다른 면을 파격에 가깝게 보여주었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다산의 대표작인 ‘목민심서’는 1818년 그가 신유사옥으로 강진에서 19년 동안 유배할 당시 완성하였다.

사회 전부분에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그 당시 민생문제 및 관리들의 본분을 함께 묶어 높은 도덕성과 청렴성을 요구하며 실천을 강조했던 명 저서다. 또한 생명의 존엄함을 바로 잡고자 수사와 재판의 공정성을 강조한 1819년에 완성한 ‘흠흠신서’와 국정에 관한 일체의 제도 법규의 개혁에 대하여 논한 ‘경세유표’ 도 그 당시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고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다산의 정확한 현실인식이 반영된 결과물인지라 관람객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이 책 서문에 “작금 온 세상이 병들고 모두 썩었다.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이다.“ 라고 우국(憂國)의 심정을 드러냈지만 무려 200여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후학들이 깨닫지 못함을 꾸짖는 것 같아 돌아서는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


다산은 자신의 학문세계와 사상을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는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고 일표(一表)와 이서(二書)는 천하와 국가를 위함이니 본말(本末)이 갖추어졌다고 했다. 사실, 개인과 국가의 철학을 다룬 다산의 학문세계는 심오하고 다양하여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이해가 없으면 그 방대한 저서의 울림(鬱林)속에서 갇히게 됨을 새삼스레 절감하며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는 학자이며 사상가이기도 했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예술가의 기질도 매우 풍부하였다.

‘열초’라는 필명으로 고향의 산수를 즐기며 달관한 삶의 여유를 담채로 묘사한 ‘열상산수도(冽上山水圖)’와 강진에서 유배 중 외동딸이 혼사를 치른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 홍씨가 보내준 헌 치마에 매화를 치고 시를 적어 보낸 정감어린 ‘매조도(梅鳥圖)’에서 그의 성정을 엿볼 수가 있었다.

 

다산은 19년간 유배지에서 고단하고 굴곡 많은 삶을 살면서 항상 자신에 대해서는 가을 서릿발처럼 냉철하고 엄격했으나 학문에 대한 열정만큼은 뜨거움 그 자체였다. 온갖 모함과 수모를 무릅쓰고도 오히려 이제 학문의 길을 갈수 있다고 즐거워하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다산에게 오늘을 사는 나약한 후학들은 진정한 삶의 길이 무엇인지 이제는 다시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무려 200년이란 값진 세월을 무심히 흘러 보내 한없이 부끄럽고 자괴감이 들지만 말이다.


대역죄인인 그를 도우려는 자가 없어 머물던 주막집에 四宜齋(생각은 맑게, 용모는 단정하게, 말은 과묵하게, 행동은 중후하게) 라는 현판을 걸고 꼿꼿하게 살았던 흔적에서 맑은 바람과 맑은 향기가 오늘까지도 이는 듯하다.(‘1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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